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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의 문서임마누엘교회 증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증인의 문서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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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의 증인들(49)_윤기호 장로(14.05.30)

관리자 2021-07-15 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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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의 증인들(48)_하유리 청년편(14.05.23)

관리자 2021-07-15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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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의 증인들(47)_손명규 집사편(14.03.13)

관리자 2021-07-15 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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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의 증인들(46)_이규석 장로편(14.02.28)

관리자 2021-07-15 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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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의 증인들(45)_ 한기쁨 대학부편(14.01.17)

관리자 2021-07-13 626
임마누엘의 증인들(46)_이규석 장로편(14.02.28)

    나의 선교를 찾아서


    <나의 선교를 찾아서>   
    이규석 장로

    안녕하세요. 이규석 장로입니다.
    제가 부산 대신동으로 이사왔을 때 그 곳에서 복음을 만나 지금의 교회로 인도받았습니다. 우리집에서 말씀운동을 했는데 그냥 여자들이 와서 시끄럽게 찬송하고 처음엔 가라했는데 서수복 권사가 앉아 보라고 하길래 다 아는 예수님 얘기인데 뭘 또 들어보라고 하는지 처음엔 볼멘소리를 냈습니다.

    저의 신앙생활 시작은 섬에서 유학와서 영도중학교 다닐 때입니다. 크리스마스 엽서에 그려진 아름다운 교회처럼 시골 언덕 위에 작은교회였습니다. 교회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차에 나를 가르치는 과외선생님이 교회 집사님이고 교회의 멋진 풍경에 반해서 자연스럽게 교회로 인도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교회를 다녔으니 교회 안팎으로 이런 저런 사건을 보게 되고 결국엔 고2 말경에 교회에서 일어난 불미스런 사건에 총무라는 이유로 쓴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복음 없이 다니다가 내가 교회를 그만둬야 되는 이유가 발견되니 이때다! 하고 바로 뛰쳐나왔습니다.

    담임 목사님 말씀대로 시험 들어도 교회는 다녔어야 했는데... 이때부터 방황도 하게 되고... 공부해서 성공하려고 부산까지 7시간 30분 걸리는 거리를 전학 왔는데... 그때부터 저의 삶은 영적으로 가파른 내리막을 달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시골 섬마을에서 선주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해안가이기 때문에 온갖 미신, 점술, 우상으로 가득합니다. 배들이 큰 바다로 몇 개월 정도 고기 잡으러 출항할 때 용왕제는 꼭 지내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무속인을 불러다가 굿하고 돼지잡고, 지금까지도 해안가에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독자인 저는 어머니께서 아들을 못 낳아 친할머니가 절에서 기도해서 태어났습니다. 한번은 유명한 점쟁이 양아들로 갈 뻔도 했고, 병원에 갈 수 없는 섬이라서 한 번씩 어머니가 아프시면 점쟁이를 불러 기도해 병이 낫고 그랬습니다.

    이런 우상숭배를 하는 영적배경에서 자라고, 예수 그리스도도 모르고 교회만 다녔으니 우리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영적문제가 들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이 아닌 다른 것에 빠져보려고 몸부림치기도 했고, 어떤 때는 책 속에 파묻혀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약 만 권정도를 읽기도 했습니다.

    전자과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한 달 한 뒤 바로 아버지께서 하시는 사업을 도우러 다시 어촌으로 내려갔습니다. 부산에서 뚜렷한 인생방향을 잡지 못하고 시골에서 조용히 살고 싶었습니다. 20대에 어촌 사업이 잘 풀리면서 집한 채 값을 하루 만에도 벌어봤습니다. 하지만 경제를 담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니 결국 돈이 나를 실패케 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성공해서 고향 유지나 공무원을 움직일 수 있는 재력을 가졌으나 영적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얼마나 피폐한 삶을 살았겠습니까? 제가 경제관에 대해 후대들에게 말하고 싶은 건 돈을 벌려고 하지 말고 돈을 벌 수 있는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실력과 그릇을 갖춰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촌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녀들 교육 때문에 다시 부산 대신동으로 이사 오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시작되었고 말씀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알고 난 다음에도 사단은 계속 나를 속이고 우리 가문에 복음의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철저히 망하고 좌절해서 다시 일어서지 못해 허우적대다 실패감에 스스로 멸망의 길을 선택하기를 바랬을 겁니다. 물론 그 때 상황은 참으로 암담 그 자체였습니다. 부산에서 하던 사업은 빚으로 돌아오고, 자살의 기로에 서보기도 했지만 매순간 예수 그리스도 복음으로 우리 가문의 영적문제를 두고 치열한 영적 싸움을 계속했습니다.

    풍랑 속에 살 길은 복음 밖에 없다는 간절함으로 가족 모두 복음 속으로 들어오고 훈련받으며 시련의 바람으로 더 앞으로 나아가던 중, 아들이 25살 때 고지혈병으로 먼저 천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떠날 때, 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갔을까? ‘아버지가 나보다 렘넌트(후대) 사역을 잘하실 거예요...’라고 생각하고 떠났을 것 같았습니다. 처음엔 아들을 보내고 렘넌트들 앞에 서기 조차 두려웠는데 지금은 아들 같은 수십 명의 후대를 만나고 함께 선교를 두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업이 어려울 때 딸 설희가 영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한국에서 기도 퍼포먼스(깊은 기도)로 문화사역을 하고 예술의 전당에서 오페라 무대 감독을 7년 하다 영국유학을 갔습니다. 저도 돈이 없어서 한 달에 50만원만 송금해 주었는데 어떻게 영국에서 살았는지 끝까지 살아남아 돌아왔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유대인과 아랍권 선교를 두고 기도하더니 갑자기 영국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겁니다. "아들 보내고 딸 하나 있는데... 너도 나랑 헤어져서 살아야 되느냐..."며 엄청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가운데 ‘이게 내 계획이다. 그 애가 기도했던 것이다.’며 양심의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아들도 내 나름대로 맞춤형으로 교육시키고 준비시켰지만 하나님의 계획대로 데려가셨는데... 하나님의 계획이면 하는 것이다고 결단하고 결혼허락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 사위 외할머니가 유대인이었습니다. 딸이 고등학교 때부터 마음에 담고 기도한 대로 유대인과 아랍권 사람들을 만나며 기도 응답대로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교회와 렘넌트를 살리는 중직자의 마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젠 선교기업이 될 수 있게 발판이 되는 양어장 사업을 물러줄 후대를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골에 와서 사업하려는 렘넌트가 없어요. 그래도 찾아보고 있습니다. 작년에 태풍 때문에 피해도 많았는데 그것도 다 하나님 계획속에 준비된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여기 시골에 교회를 세우고 싶다는 꿈을 조금씩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미흡하나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 된 후 개인, 가정, 가문 속에 깊게 뿌리 내려져 있었던 흑암 세력이 무너지고 복음가문으로 세워 주신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렘넌트들에게 하고 싶은 말>


    실패를 두려워 하지마라! 믿음이 있다면 실패의 체험보다 좋은 선생은 없더라.
    도전하라! 한만큼 배운 것이다.
    예배에 성공해라! 예배실패 인생실패.
    남해에서 배타고 차타고 세 시간이 걸려도 예배드리러 부산까지 온다.(렘넌트 아들, 딸들도 보고)
    어릴 때부터 선교를 생각해라. 그것이 선교다.

     


     

임마누엘의 증인들(46)_이규석 장로편(14.02.28)

    나의 선교를 찾아서


    <나의 선교를 찾아서>   
    이규석 장로

    안녕하세요. 이규석 장로입니다.
    제가 부산 대신동으로 이사왔을 때 그 곳에서 복음을 만나 지금의 교회로 인도받았습니다. 우리집에서 말씀운동을 했는데 그냥 여자들이 와서 시끄럽게 찬송하고 처음엔 가라했는데 서수복 권사가 앉아 보라고 하길래 다 아는 예수님 얘기인데 뭘 또 들어보라고 하는지 처음엔 볼멘소리를 냈습니다.

    저의 신앙생활 시작은 섬에서 유학와서 영도중학교 다닐 때입니다. 크리스마스 엽서에 그려진 아름다운 교회처럼 시골 언덕 위에 작은교회였습니다. 교회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차에 나를 가르치는 과외선생님이 교회 집사님이고 교회의 멋진 풍경에 반해서 자연스럽게 교회로 인도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교회를 다녔으니 교회 안팎으로 이런 저런 사건을 보게 되고 결국엔 고2 말경에 교회에서 일어난 불미스런 사건에 총무라는 이유로 쓴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복음 없이 다니다가 내가 교회를 그만둬야 되는 이유가 발견되니 이때다! 하고 바로 뛰쳐나왔습니다.

    담임 목사님 말씀대로 시험 들어도 교회는 다녔어야 했는데... 이때부터 방황도 하게 되고... 공부해서 성공하려고 부산까지 7시간 30분 걸리는 거리를 전학 왔는데... 그때부터 저의 삶은 영적으로 가파른 내리막을 달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시골 섬마을에서 선주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해안가이기 때문에 온갖 미신, 점술, 우상으로 가득합니다. 배들이 큰 바다로 몇 개월 정도 고기 잡으러 출항할 때 용왕제는 꼭 지내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무속인을 불러다가 굿하고 돼지잡고, 지금까지도 해안가에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독자인 저는 어머니께서 아들을 못 낳아 친할머니가 절에서 기도해서 태어났습니다. 한번은 유명한 점쟁이 양아들로 갈 뻔도 했고, 병원에 갈 수 없는 섬이라서 한 번씩 어머니가 아프시면 점쟁이를 불러 기도해 병이 낫고 그랬습니다.

    이런 우상숭배를 하는 영적배경에서 자라고, 예수 그리스도도 모르고 교회만 다녔으니 우리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영적문제가 들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이 아닌 다른 것에 빠져보려고 몸부림치기도 했고, 어떤 때는 책 속에 파묻혀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약 만 권정도를 읽기도 했습니다.

    전자과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한 달 한 뒤 바로 아버지께서 하시는 사업을 도우러 다시 어촌으로 내려갔습니다. 부산에서 뚜렷한 인생방향을 잡지 못하고 시골에서 조용히 살고 싶었습니다. 20대에 어촌 사업이 잘 풀리면서 집한 채 값을 하루 만에도 벌어봤습니다. 하지만 경제를 담을 그릇이 준비되지 않으니 결국 돈이 나를 실패케 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성공해서 고향 유지나 공무원을 움직일 수 있는 재력을 가졌으나 영적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얼마나 피폐한 삶을 살았겠습니까? 제가 경제관에 대해 후대들에게 말하고 싶은 건 돈을 벌려고 하지 말고 돈을 벌 수 있는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실력과 그릇을 갖춰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촌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녀들 교육 때문에 다시 부산 대신동으로 이사 오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시작되었고 말씀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알고 난 다음에도 사단은 계속 나를 속이고 우리 가문에 복음의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철저히 망하고 좌절해서 다시 일어서지 못해 허우적대다 실패감에 스스로 멸망의 길을 선택하기를 바랬을 겁니다. 물론 그 때 상황은 참으로 암담 그 자체였습니다. 부산에서 하던 사업은 빚으로 돌아오고, 자살의 기로에 서보기도 했지만 매순간 예수 그리스도 복음으로 우리 가문의 영적문제를 두고 치열한 영적 싸움을 계속했습니다.

    풍랑 속에 살 길은 복음 밖에 없다는 간절함으로 가족 모두 복음 속으로 들어오고 훈련받으며 시련의 바람으로 더 앞으로 나아가던 중, 아들이 25살 때 고지혈병으로 먼저 천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떠날 때, 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갔을까? ‘아버지가 나보다 렘넌트(후대) 사역을 잘하실 거예요...’라고 생각하고 떠났을 것 같았습니다. 처음엔 아들을 보내고 렘넌트들 앞에 서기 조차 두려웠는데 지금은 아들 같은 수십 명의 후대를 만나고 함께 선교를 두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업이 어려울 때 딸 설희가 영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한국에서 기도 퍼포먼스(깊은 기도)로 문화사역을 하고 예술의 전당에서 오페라 무대 감독을 7년 하다 영국유학을 갔습니다. 저도 돈이 없어서 한 달에 50만원만 송금해 주었는데 어떻게 영국에서 살았는지 끝까지 살아남아 돌아왔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유대인과 아랍권 선교를 두고 기도하더니 갑자기 영국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겁니다. "아들 보내고 딸 하나 있는데... 너도 나랑 헤어져서 살아야 되느냐..."며 엄청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가운데 ‘이게 내 계획이다. 그 애가 기도했던 것이다.’며 양심의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아들도 내 나름대로 맞춤형으로 교육시키고 준비시켰지만 하나님의 계획대로 데려가셨는데... 하나님의 계획이면 하는 것이다고 결단하고 결혼허락을 했습니다. 알고 보니 사위 외할머니가 유대인이었습니다. 딸이 고등학교 때부터 마음에 담고 기도한 대로 유대인과 아랍권 사람들을 만나며 기도 응답대로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교회와 렘넌트를 살리는 중직자의 마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젠 선교기업이 될 수 있게 발판이 되는 양어장 사업을 물러줄 후대를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골에 와서 사업하려는 렘넌트가 없어요. 그래도 찾아보고 있습니다. 작년에 태풍 때문에 피해도 많았는데 그것도 다 하나님 계획속에 준비된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여기 시골에 교회를 세우고 싶다는 꿈을 조금씩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미흡하나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 된 후 개인, 가정, 가문 속에 깊게 뿌리 내려져 있었던 흑암 세력이 무너지고 복음가문으로 세워 주신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렘넌트들에게 하고 싶은 말>


    실패를 두려워 하지마라! 믿음이 있다면 실패의 체험보다 좋은 선생은 없더라.
    도전하라! 한만큼 배운 것이다.
    예배에 성공해라! 예배실패 인생실패.
    남해에서 배타고 차타고 세 시간이 걸려도 예배드리러 부산까지 온다.(렘넌트 아들, 딸들도 보고)
    어릴 때부터 선교를 생각해라. 그것이 선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