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나경숙 집사의 2층 다락방
1987년 8월 2일

1987년 당시 영도구 동삼동 D교회에서 내부 분쟁으로 교인들이 흩어지고 예배할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자 8월 2일, 김금애 권사와 나경숙 집사를 포함한 16명의 성도들이 주일을 지키기 위해 나경숙 집사의 2층 13평 다락방을 예배처로 삼아 모인 것을 시작으로 박원규 장로, 김형관 집사(1999년에 장로 임직을 받고 교회를 섬기다가 2008년에 소천)가 합류하면서 동삼제일교회(현 임마누엘교회)의 틀이 갖춰지게 됩니다.

삼원스포츠건물 2층 교회당
1987년 10월 7일

이마저도 주변의 방해와 시끄럽다는 항의에 부딪혀 결국 찾아낸 곳이 의류를 만들던 삼원스포츠 건물이었고, 삼원스포츠 2층 12평이 교회의 온전한 첫 예배 처소가 되었습니다.

삼원스포츠건물 2층 성탄예배 후
1987년 12월 25일

조금만 움직여도 삐걱대는 소리가 들리던 이 예배처소에서 마저도 새벽기도회나 철야기도회는 가질 수 없어서 임마누엘기도원이나 산으로 올라가 기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전교인 모습
1987년 11월

목회자를 모시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교회와 박원규 장로는 류광수 목사에 대해 듣게되고, 류목사의 설교테잎을 들은 당시 30여명의 성도들의 만장일치로 류광수 목사의 청빙이 결의 되었습니다.

동삼제일교회주보
1987년 11월 1일

공식 부임 전, 동삼제일교회를 방문한 류광수 목사의 첫 번째 설교는 “바울아 두려워 말라, 가이사 앞에 서야 하리라(행27:9-25)” 였으며, 1987년 9월 30일에 정식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동삼제일교회주보 2
1987년 10월 7일

류광수 목사의 부임 직후인 1987년 10월 7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부산노회는 동삼제일교회(현 임마누엘교회)의 설립을 허락하여, 조직 교회로서의 모습이 공식적으로 갖추어지게 되었습니다.

평신도 전도학교 개교예배
1990년 2월 27일

류광수 목사는 부임 후 ‘평신도 전도학교’를 실시하여 평신도들이 가지고 있던 전도에 대한 오해를 풀고 ‘전도는 되어지는 것’이라는 성경적인 관점을 가지도록 훈련시켰습니다. 이후 성도들이 자기 집을 개방하여 다락방 성경공부가 시작되고, 동삼동과 영도 일대에서 다락방 운동을 통해 본격적인 말씀운동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다락방 현황
1989년 3월 1일

1987년 11월 22일 주일에는 전도훈련 1기생이 배출되었고 10곳의 다락방 기도제목이 나왔으며, 바로 다음주인 11월 29일에는 다락방이 15곳으로 늘어났습니다.

지역다락방 모임
1989년

또한 남자 전도팀 한 팀, 여자 전도팀 여섯 팀이 구성되었고, 청년회에서 두 팀, 학생회에서 한 팀이 구성되었으며 EBS 요원(새신자 양육요원)과 전도요원들은 수요예배 후 모임을 갖기로 했습니다.

동삼제일교회 입구
1989년

이렇게 교회가 한창 영적으로 뜨거워져 있을 때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류광수 목사가 6개월 동안 강단을 떠나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평신도 요원들을 세우고 전도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 놓았기 때문에 교회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8월 지역별 어린이 여름 성경학교
1988년 8월 1일

이 기간 동안 교회는 경희어망 앞 지하 35평에 새로운 예배 처소를 얻었고, 주일학교는 200명으로 부흥되었습니다.

다락방성경공부교재
1991년 2월 23일

류광수 목사의 전도훈련은 처음에는 특별한 교재 없이 직접 메시지를 기록한 종이를 가지고 왔고 이것이 후일에 정리되어 오늘날의 다락방 전도훈련 교재가 됩니다.

임시예배처소로 사용되던 천막이 화재로 전소된 모습
1990년

영도 지역 안에서만 30여 군데 황금어장을 지정하여 전도운동을 전개하면서 급속도로 교회가 소문이 나기 시작하고, 모여드는 사람들로 교회가 포화상태가 되자 교회 옆 건물을 임대했지만, 그것도 모자라 주차장에 천막을 설치하고 교회 버스에도 모니터를 달아 예배를 드려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부흥은 많은 성도들을 고무시켜 현장 전도로 더욱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교회 내부 자리 부족
1990년 12월 24일

그리하여 전개된 대표적인 현장 전도 가운데, 1988년부터 교회와 류광수 목사는 공단 선교를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고, 많은 제자들이 공단 안에 세워졌으며 이 공단 사역의 바통을 이어받은 백운규 전도사(현 부목사)가 신학교를 휴학하고 공장에 취직하면서 본격적으로 공단 다락방이 시작됩니다.

용두산 찬양 전도
1989년 9월 3일

다락방 말씀운동 본격화와 함께 제일 먼저 등장한 기능선교가 찬양선교로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태종대공원, 용두산공원, 부산역 등에서 찬양전도를 하게 되었고, 이후 모든 성도들이 동참하여 일부는 찬양, 일부는 모인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찬양전도운동이 본격화 되었습니다.

용두산 찬양 전도
1989년 9월 3일

다락방 말씀운동 본격화와 함께 제일 먼저 등장한 기능선교가 찬양선교로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태종대공원, 용두산공원, 부산역 등에서 찬양전도를 하게 되었고, 이후 모든 성도들이 동참하여 일부는 찬양, 일부는 모인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찬양전도운동이 본격화 되었습니다.

용두산 찬양 전도
1989년 9월 3일

이후 계속 일어나는 찬양집회를 위한 찬양팀이 구성되었고, 이성훈 전도사(현 부목사)가 리더가 되어 헌신하면서 이 찬양팀의 전도사역이 확장되며 자연스럽게 미용, 의료팀의 전도사역으로 뻗어나가게 됩니다.

부산역 찬양 전도
1993년 11월 7일

이후 계속 일어나는 찬양집회를 위한 찬양팀이 구성되었고, 이성훈 전도사(현 부목사)가 리더가 되어 헌신하면서 이 찬양팀의 전도사역이 확장되며 자연스럽게 미용, 의료팀의 전도사역으로 뻗어나가게 됩니다.

하기수련회
1991년 8월 5일

1990년 1월 28일 주일 저녁예배에서 전한 ‘다락방 전도신학’에 대한 말씀에서 류광수 목사는 초대교회에 나타난 사도적인 신학을 주창하며 동삼제일교회(현 임마누엘교회)는 ‘하나님이 확실히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선교 센터가 되어야 한다는 교회의 비전을 제시하였습니다.이어 1990년 4월에는 훈련의 5단계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며 이 시기에 기초적인 교재들이 완성되었는데 복음편지, EBS, 사명자 가이드, 현장복음메시지 등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하기수련회
1991년 8월 5일

1990년 1월 28일 주일 저녁예배에서 전한 ‘다락방 전도신학’에 대한 말씀에서 류광수 목사는 초대교회에 나타난 사도적인 신학을 주창하며 동삼제일교회(현 임마누엘교회)는 ‘하나님이 확실히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선교 센터가 되어야 한다는 교회의 비전을 제시하였습니다.이어 1990년 4월에는 훈련의 5단계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며 이 시기에 기초적인 교재들이 완성되었는데 복음편지, EBS, 사명자 가이드, 현장복음메시지 등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13군데 선교관 기도회 모습
1992년 8월

류광수 목사가 외친 전도와 현장에 대한 복음메시지는 부산 경남의 목회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이슈가 되었고, 1991년 4월 정필도 목사가 시무하던 수영로교회 집회 이후 외부사역이 본격화 되었는데, 이 집회에서 일어난 역사가 몇가지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선교관 운영전략

1. 수영로교회 집회가 겹치면서 4월 정기노회에 불참하게 된 첫번째 괘씸죄.
2. 부산복음화를 위한 13개 선교관을 조직, 그 중 사하구를 맡고 있던 강칠세 집사(현 장로)가 개인적으로 ‘사하구를 그리스도께로’라는 전도지를 만들어 돌린 것과 이 운동을 함께 하던 교회 이름이 적혀있는 것 등을 못마땅해 한 것으로 두 번째 괘씸죄.
3. 동삼제일교회(현 임마누엘교회) 중직자들이 당시 이단 시비를 당하고 있던 창원의 산해원교회를 방문한 일이 빌미가 된 것인데, 이것은 성전에 대한 틀을 깨고 싶었던 류목사가 조립식 건물을 어떻게 지었는지 보기 위해 중직자들과 함께 현장을 방문한 것으로, 자꾸만 모여드는 성도들이 앉아 예배드릴 장소가 없어서 넓은 땅에 조립식 건물을 지어 평일에는 칸막이로 막아 여러 부서의 건물로 사용하고 주일에는 그것을 접어 큰 예배당으로 사용한다는 산해원교회에 대한 소문을 듣고 교회 건축위원들과 그 교회를 견학한 것이었습니다. 건물만 보고 오는 것이라 문제가 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이것을 빌미로 삼아 교회가 공격을 받게 된 것입니다.

탈퇴성명서
1991년 11월 18일

세계복음화의 발판을 마련하고 힘차게 외부사역을 시작하려던 찰나에 1991년 합동측 부산노회로부터 “13개 선교관을 철수할 것. 전도집회는 동삼동 안에서만 할 것. 류광수 목사에게 강단은 허락하지만, 류목사의 당회장직은 1년 동안 박탈함.” 이라는 내용의 공문과 함께 교회 안팎으로 압박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동삼제일교회의 부교역자들이 모두 합동측 신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신학교에서조차 압박을 해왔고, 이 모든것을 막으실 수도 있었던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황임을 알고 하나님의 계획을 찾는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목사면직공고
1991년 12월 15일

합동측 기관지인 기독신보에 이미 교단을 탈퇴한 류목사에게 목사면직공고가 나왔는데, 면직 사유로 ‘베뢰아 아카데미 수료자’ 라는 죄목을 붙였습니다.
류광수 목사는 베뢰아 아카데미라는 단체에 간 적도 없었고, 그 지도자를 만난 적도 없었으며, 본 적도 없었습니다. 베뢰아 아카데미 측에서도 ‘류광수 목사는 자신들과 관련이 없다.’고 밝힐 정도였는데,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해명서
1992년 1월 4일

“본인은 지금까지 노회의 원칙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단, 노회를 탈퇴한 것은 징계내용이 본인의 양심상 사실과 전혀 달랐기 때문에 부득불 취해진 일입니다.”
이 해명서를 통해 노회관계 및 베뢰아 아카데미와 무관함, 이단 사상고무 찬양 문제에 대한 오해, 기성교회에 관한 언급 문제등을 해명하였습니다. 결국 동삼제일교회(현 임마누엘교회)는 1991년 12월에 합동측 부산노회를 탈퇴하고 1992년 1월 22일에 고신교단에 가입하게 됩니다.

전교인 체육대회
1991년 6월 6일

외적인 풍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매주 새신자들로 넘쳐나 당시 교인 재적수는 250~300명 정도였고, 다락방은 117곳에서 진행되었으며, 교회는 점점 영적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1992년 9월, 동삼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된 전교인 체육대회에는 400여명이나 되는 성도들이 참석하며 전 성도가 원니스를 이루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전교인 체육대회
1991년 6월 6일

외적인 풍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매주 새신자들로 넘쳐나 당시 교인 재적수는 250~300명 정도였고, 다락방은 117곳에서 진행되었으며, 교회는 점점 영적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1992년 9월, 동삼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된 전교인 체육대회에는 400여명이나 되는 성도들이 참석하며 전 성도가 원니스를 이루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소년원 사역
2017년 12월

청년들은 한 주도 빠짐없이 용두산공원 등에서 길거리 찬양전도를 했으며, 현장에서는 전문별, 연령별, 지역별 다락방 등이 활발하게 진행되어갔습니다. 이 때 시작된 또 하나의 사역이 교도소 선교였는데, 교회 집사의 아들이 친구들의 싸움에 휘말리면서 부산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그를 돕기 위해 류광수 목사가 교도소를 찾아갔던 것이 지속되는 전도 사역으로 연결된 것이며 이 사역은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소년원 사역
2017년 12월

청년들은 한 주도 빠짐없이 용두산공원 등에서 길거리 찬양전도를 했으며, 현장에서는 전문별, 연령별, 지역별 다락방 등이 활발하게 진행되어갔습니다. 이 때 시작된 또 하나의 사역이 교도소 선교였는데, 교회 집사의 아들이 친구들의 싸움에 휘말리면서 부산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그를 돕기 위해 류광수 목사가 교도소를 찾아갔던 것이 지속되는 전도 사역으로 연결된 것이며 이 사역은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손민영 선교사 파송 예배
1990년 1월

거듭되는 교회의 성장과 함께 선교운동이 시작되었는데 1990년 1월 7일, 손민영 평신도 선교사를 필리핀으로 파송하는 예배를 드린 것을 시작으로 해외선교사 파송이 시작되었습니다.

류영희 선교사 파송 예배
1990년 4월

해외선교사 파송이 시작된 1990년 4월에는 류영희 선교사 파송예배를 드리게 되고, 이를 기점으로 교회에 해외선교에 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김종구 집사(이후 목사로 시무하다 은퇴)의 해상 선교, 류광수 목사의 러시아 선교 및 태국 선교 등에 함께 했던 성도들이 ‘선교’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태국 전도 훈련 세미나
1991년 8월 20일

말씀을 붙잡은 성도들 사이에서 첫 해외선교 사역을 두고 얘기하던 중 1992년 2월에 동삼제일교회 최초의 해외선교사역이 태국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기차로 선교지를 돌다 들어가게 된 것이 카렌족의 난민 캠프 지역이었습니다.

태국 열차 안에서

말씀을 붙잡은 성도들 사이에서 첫 해외선교 사역을 두고 얘기하던 중 1992년 2월에 동삼제일교회 최초의 해외선교사역이 태국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기차로 선교지를 돌다 들어가게 된 것이 카렌족의 난민 캠프 지역이었습니다.

카렌 선교 - 박원규 장로

당시 박원규 장로가 본 카렌 난민족의 상황은 너무나 열악했지만 현지 학생들의 학업의 열정을 보았고 교회에 돌아와 30여명의 후원자와 함께 매달 110만원이상의 선교비로 카렌 신학교를 후원하며 다락방 교재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카렌 선교 - 박원규 장로

당시 박원규 장로가 본 카렌 난민족의 상황은 너무나 열악했지만 현지 학생들의 학업의 열정을 보았고 교회에 돌아와 30여명의 후원자와 함께 매달 110만원이상의 선교비로 카렌 신학교를 후원하며 다락방 교재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카렌 사역 - 강칠세장로

박원규 장로, 강칠세 장로와 청년들을 주축으로 시작되어 수많은 제자들을 남기게 된 태국 카렌 선교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교회의 대표적 선교 사역이기도 합니다.

태국 카렌족 선교(신학교)

박원규 장로, 강칠세 장로와 청년들을 주축으로 시작되어 수많은 제자들을 남기게 된 태국 카렌 선교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교회의 대표적 선교 사역이기도 합니다.

가나안수양관, 목회자 전도훈련
1991년

대형집회 위주로는 ‘다락방을 통한 말씀운동과 제자 양육’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1991년, 부산 금정구 남산동 두실에 본부를 둔 다락방전도훈련원이 출범하게 되었고, 훈련원이 주체가 된 집중적인 전도훈련과 세미나가 김해 장유수양관, 송정리 청소년수양관, 가나안수양관 등지에서 개최되게 되었습니다.
이 중 가나안수양관 집회는 다락방전도운동의 20가지 전략, 다락방 운동의 의의가 정리된 집회였습니다. 이 집회는 1990년 말에 여섯명으로 시작하여 참석자가 너무 많아져 더 이상 집회를 지속하기 어려워지게 된 1992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당시 류광수 목사는 다락방 전도운동의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아홉 가지를 설명했습니다.
“다락방 전도운동은 첫째, 예수 생명 운동이다. 예수 능력 운동이다. 예수 권세 운동이다. 둘째,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운동이다. 셋째, 평신도가 일어나는 운동이다. 넷째, 충성된 자를 찾는 운동이다. 다섯째, 복음화를 위해 제자를 삼는 운동이다. 여섯째, 재생산하는 운동이다. 일곱째, 치유하는 운동이다. 여덟째, 잃었던 축복을 회복하는 운동이다. 아홉째,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복음적 사역이다.”
전도신학원과 선교사훈련원, 치유사역과 후대사역에 대한 기본적인 틀이 이로써 정리되게 된것입니다.

제1기 1차합숙 실시
1992년 8월

다락방전도학교의 설립은 교회 내에서 진행되던 다락방 전도를 전국적인 운동으로 변화시킨 시발점이 되었는데, 애초에 교회 내 평신도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세웠던 시스템이 1991년 2월부터는 교회와 상관없이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전도학교로 확장되게 되었습니다.

류광수 목사는 개강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알기를 원하시는 분이나, 새신자를 말씀으로 양육하기를 원하시는 분, 사명자를 훈련시키기 원하시는 분, 그래서 부산을 복음의 밭으로 일구기를 원하시는 분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사역은 교회 외부로 급속히 확장되어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말씀운동의 현장과 그 증거를 보려는 목회자와 사명자들이 몰려오게 되어 이들을 위해 숙소를 마련해 주고 강의를 따로 전달하게 되면서 시작된 것이 다락방전도 1차합숙 훈련의 시작입니다.

합숙훈련은 전도현장의 실제참여, 다락방운동의 실제 참관 및 워크숍, 전도자의 개인 기도훈련과 말씀훈련, 제자 훈련의 실제 참여를 목적으로 하였고, 찬양전도·의료전도의 실제, 전도의 배경 이해, 메시지의 배경 이해, 합숙훈련을 통한 전도 역사 체험 등을 내용으로 하였습니다.

70인 훈련
1996년 9월 6일

1993~94년에 들어서자 교회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전국과 해외에서 다락방전도운동을 훈련받기 위해 들어오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매주 새신자들의 등록으로 교회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좁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점차 훈련의 마스터플랜이 완성되어가기 시작했고 전도학교에 이어 1994년 3월에는 전도신학원이 개원되었습니다. 2년동안 70인 요원 중심으로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OM선교사후보생 전도합숙훈련
1993년 2월 7일

이렇게 교회 내부 사역은 교회 현장 사역과 훈련원 사역으로 이원화되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훈련원을 교회 행정과 분리하면서 재정도 분리했다는 점이었는데, 이것은 다락방 전도운동이 세계복음화를 감당할 수 있게 하는 그릇을 준비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의 기도와 이해, 협조 없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LA 다락방전도세미나
1994년 9월 19일

1994년에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전도세미나가 이어졌고 이 흐름속에 전국 대학생 사명자 모임, 전국 중고 하계 수련회, 전국 청년 대학 여름수련회, 주교교사 강습회 등이 개최되었습니다. 또한 일본, 미국LA와 샌프란시스코 등에서도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다락방 전도운동에 참여함으로써 다락방전도운동은 해외로 파급되었고 순식간에 미주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정지태선교사 파송예배
1994년 9월 4일

최초로 다락방전도훈련원이 주관한 선교사 파송이 일어나, 정지태 선교사가 싱가포르에 파송되었으며, 다락방전도운동과 동삼제일교회를 상징하는 로고가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다락방 전도운동은 숨 돌릴 틈 없는 확장기를 지나고 있었고, 어느덧 동삼제일교회는 전국과 세계로 확산되는 복음운동의 모체요, 다락방전도운동의 산실로 자리매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입당기념예배
1994년 11월 5일

1994년 1월 원단기도회를 기점으로는 매일 밤 성전건축을 위한 12시 기도회가 지속적으로 이어졌습니다. 훈련을 위한 3,500평 성전이 세워지도록, 4만 다락방이 일어나도록, 전도학교와 전도신학원을 세워 부산과 전국에 사명자들이 세워지도록 정시기도 제목이 전달되었고 마침내 35평에서 현재의 3,500평 부지의 성전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입당기념예배
1994년 11월 5일

1994년 1월 원단기도회를 기점으로는 매일 밤 성전건축을 위한 12시 기도회가 지속적으로 이어졌습니다. 훈련을 위한 3,500평 성전이 세워지도록, 4만 다락방이 일어나도록, 전도학교와 전도신학원을 세워 부산과 전국에 사명자들이 세워지도록 정시기도 제목이 전달되었고 마침내 35평에서 현재의 3,500평 부지의 성전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현재부지의 교회당 모습
1995년 1월

교회가 새 성전으로 이전하면서 새로운 시스템 속에서 복음 중심의 교회, 세계선교의 전진 기지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4만 40만 1천만 전도제자를 세우는 것이 교회의 명료한 비전이었고, 1995년 ‘다락방 방송센터’가 신설이 되어 류광수 목사의 주일 및 전국 집회 메시지, 통역 메시지 등이 제작되어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새 성전에서의 예배 모습
1996년 2월 17일

동삼제일교회가 5년동안 급속도로 성장하다가 500명을 넘어서면서부터 몇 개월동안 성장이 정체되는 시기를 겪게 되었고, 6년 반 정도가 지날 무렵부터 ‘팀 사역자’를 세웠습니다.
팀 사역자는 전도의 문을 계속 여는 사람을 일컫는데 교회는 1994년 11월 새 성전 입당을 앞두고 교회 성장을 위한 팀 사역자를 세웠던 것입니다.
교회는 줄곧 부흥되어 교회 입당 무렵에는 교인수가 1,000여명을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제1기 70인 1차 훈련
1995년 4월 26일

그리고 1995년 4월 26일부터 26일까지는 70인 1차 합숙훈련이 시작되었는데, 70인 요원은 사역자, 팀 사역자, 사명자를 지역에서 묶어 미션 홈을 움직이는 요원이며, 사명자를 계속해서 찾고, 다락방을 뛰는 사역자를 관리하며, 팀사역자와 사역자, 사명자에게 메시지를 주고 핵심요원을 움직이며 사도행전의 비밀을 깨닫게 만드는 요원입니다.

현장복음화 지역전도 현황 게시판
1996년

그리고 1995년 4월 26일부터 26일까지는 70인 1차 합숙훈련이 시작되었는데, 70인 요원은 사역자, 팀 사역자, 사명자를 지역에서 묶어 미션 홈을 움직이는 요원이며, 사명자를 계속해서 찾고, 다락방을 뛰는 사역자를 관리하며, 팀사역자와 사역자, 사명자에게 메시지를 주고 핵심요원을 움직이며 사도행전의 비밀을 깨닫게 만드는 요원입니다.

전도신학원 종강세미나
1994년 12월 5일

1987년부터 1996년까지 다락방 전도훈련의 중심은 동삼제일교회였고, 세계복음화를 위해 전도훈련 및 전체 사역과 개교회 사역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1994년부터 훈련원 사역과 교회 사역이 분리되며 이어 1995년 5월에는 세계복음화전도협회가 발족됩니다.
1994년 3월부터는 전도신학원이 부산, 서울, 대구 등에 연이어 세워졌고, 1997년 3월 6일에는 선교사훈련원이 개원되었습니다. 특히 선교사훈련원은 8개 분야의 제자를 삼는 지교회 요원을 세우기 위한 훈련 과정으로서, 전도신학원을 통해 찾아진 전도제자들에게 더욱 심화된 전도훈련을 실시하게 되었다는 의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1997년 10월 20일에는 치유 메시지가 선포되었고 이때부터 치유사역이 본격화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치유팀, 정신치유팀, 무속치유팀, 가족치유팀이 각각 세워졌으며 이것이 후에 ‘치유총국’으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제1차 세계렘넌트대회
1998년

1997년은 “열방이 네게로(사60:1-22)”라는 메시지의 주제가 그대로 응답되는 한 해가 되었는데, 1.5세, 2세들을 위한 렘넌트 운동이 시작되었고, 선교사훈련원이 열리게 되었으며, 세계선교대회가 시작되었고 앞으로 후대를 키울 메시지 연구실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도제목 하에 총회신학연구원(현 RTS)과 AUC(현 RU)도 세워진 한 해 였습니다. 이렇게 다락방 전도운동은 전 세계로 뻗어나가게 되었고, 동삼제일교회와 성도들은 이 사역의 모태이자 든든한 기반으로서 그 한가운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1997년 여름에 교회에서 열린 중,고 여름수련회에는 150여명의 해외 청소년들이 참석했는데 이것이 세계렘넌트대회(WRC)의 싹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98년 여름수련회에서 해외렘넌트들이 동삼제일교회로 모여들어 한 달 이상 훈련을 받았고, 이것이 세계렘넌트대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대회를 1차로 현재 23차 세계렘넌트대회까지 매년 후대들을 위한 렘넌트운동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참고] 류광수 목사가 대외적으로 첫 렘넌트 집회(중·고 청소년, 대학, 청년 하계수련회)를 연 것은 1992년 7월 27일부터 8월 1일까지 부산 외국어대학교에서 였습니다. 후대 사역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류광수 목사는 1997년부터 해외 렘넌트, 특히 정체성으로 어려움을 겪는 미국의 1.5세 2세들이 여름수련회에 참석하게 된 것을 계기로 삼고, ‘렘넌트(Remnant: 흩어진자, 남은 자)운동’을 제창하게 되었습니다.

창립총회공고 안내문
1997년 9월 2일

몇 년 동안 한국 교계에서 다락방 전도운동에 대한 핍박이 지속되면서, 자진하여 소속 교단을 탈퇴한 목회자들, 혹은 소속 교단에서 면직되고 제명된 목회자들이 모여, 1997년 9월 10일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도총회를 창립하게 됩니다.

전도총회 창립소식을 알린 신문광고

초대 총회장 박지온 목사는 기자회견을 통해 “전도에 방해되면 총회도 해산할 것입니다.”라고 선언하였는데, 다락방 전도운동에 참여한 모든 목회자와 교회의 중심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취임 일성이었습니다.
합동 측의 정죄 이후, 대부분의 교단도 다락방 운동을 정죄하기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류광수 목사는 ‘한국 교회와 함께 가겠다.’는 것과 ‘잘못된 점은 고치며, 오해되었던 부분은 풀어나가도록 노력할 것이다.’라고 밝혔습니다. 이에 ‘다락방 류광수 목사 이단성 검증 공청회’가 1998년 8월 27일 서울 횃불선교센터에서 3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고, 류광수 목사는 기조연설문에서 자신의 신앙관이나 교리와 신조가 정통신학과 다르지 않음을 천명하고, 그동안 전도를 해오는 과정에서 발생한 잘못과 오해를 고쳐나갈 것이라고 했음에도, 정치적 이해관계가 사실 확인보다 우선이었던 각 교단은 수용할 뜻이 없었습니다.

전국의 사명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교회마당

전도총회의 창립과 함께, 다락방전도훈련도 갈수록 시스템을 갖추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1997년 12월 21일 이후에는 전문별 팀 합숙 훈련이 시작되면서 각 사역이 전문화 되고 시스템화 되었습니다. 전국의 전문사역에 헌신하는 사역자들이 매주 주일 저녁마다 동삼제일교회 곳곳에 흩어져 모임을 가지고, 현장의 증거와 자신들의 다양한 경험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후에 전국적인 전문별 시스템으로 확립되게 된 것입니다. 전문별 모임 장소가 부족해지자 1997년 9월에 에덴금호상가를 구입하여 건물 2층과 3층 곳곳에서 전문 사역별로 메시지와 현장을 소개하는 현장이 되도록 했고, 밤 10시 산업선교 모임이 끝나도 사그라들지 않는 이들의 열기는 핵심요원훈련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서울 서초지교회 초기 모습

1998년에 다섯기초를 마무리하는 지교회 전략에 대한 메시지가 선포되면서, 1999년부터 교회의 행정은 지교회 중심으로 변화되었습니다.
1999년 1월 1일 원단 2강에서 “앞으로 받을 축복-지교회(행27:23-25)라는 제목으로 메시지를 전하며 동삼제일교회를 시작으로 전국에 지교회 운동을 펼쳐나갈 것을 역설했습니다.

“첫째, 지교회는 사람이다. 건물 이전에 그 지역에 살며 그리스도를 누리는 평신도를 말한다. 전도하는 제자를 말한다. 둘째, 지교회는 지역교회다. 영어로 말하면 Local Church로, 본교회와 연결된 현장의 평신도를 말한다. 지역은 평신도가 사는곳, 일하는 곳을 중심으로 응답을 받으며 조용히 전도하는 것이다. 셋째, 지교회는 현장교회다. 넷째, 지교회는 평일 교회다. 다섯째, 지교회는 평신도교회다.”
이 말씀의 흐름을 따라 동삼제일교회 당회는 1999년 5월 23일, 교회의 사역자 30여명을 부산과 경남 일대 31개 지역의 지교회로 파송하기로 하면서 본격적인 지교회 운동의 문을 열었습니다.

서울 서초지교회 입당예배
1999년 2월 7일

지교회 운동은 4천 지교회를 세워 민족 복음화에 필요한 40만 요원을 일으키는 전도운동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요 지교회가 세워지는데 1999년 2월 7일에 설립된 서울서초지교회가 오늘날의 임마누엘서울교회 탄생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또한 울산로교회(현 임마누엘울산교회), 해운대, 기장 등에서 주요 지교회가 세워지며 “복음전할 곳은 많은데 복음을 전할 교회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지교회를 통해 지역의 다른 교회들을 현장에서 도와주며 한국교회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라는 사명을 품게 되었습니다.

명예신학박사 학위수여식
2000년 9월 5일

2001년 전도캠프와 지교회 운동이 전국과 세계로 확산되어가면서 ‘전도제자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류광수 목사는 국내 및 해외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꾼들에게 국내외 집회 스케쥴에 따라 ‘전도제자 모임’을 결성하도록 하며,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전도현장에서 일어났던 일을 서로 이야기하며 기도하는 포럼시간을 갖자”고 말했습니다.

AUC초대총장 취임예배
2001년 1월 23일

2000년 12월 26일, 동삼제일교회 당회실에서 처음으로 ‘전도제자 모임’이 실시된 후 일본 오사카를 시작으로 미국, 대전, 캐나다, 부산, 서울대, 필리핀, 천안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 모임에 합류한 목회자들은 ‘전도 현장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매주 전도계획을 세울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한편 전도제자 시대의 선포와 함께 AUC(현 RU)에 박사과정이 개강되었고 먼저 류광수 목사가 AUC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임마누엘 호주교회

국내 31개 지역에 지교회들이 설립되면서 해외에서도 지교회들이 곳곳에서 설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중직자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던 곳에 지교회가 설립된 것입니다. 지교회들이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위성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임마누엘 펜실베니아교회(최규선장로 장립)

국내 31개 지역에 지교회들이 설립되면서 해외에서도 지교회들이 곳곳에서 설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중직자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던 곳에 지교회가 설립된 것입니다. 지교회들이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위성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故 장차연 권사 발인 예배
2001년 11월 16일

2001년 11월 16일 류광수 목사를 시대적인 전도자로 키운 기도의 어머니 장차연 권사가 소천한 후, 기도의 사명을 천명으로 받은 이신혜 전도사와 몇 명의 권사들이 교회 본당 앞쪽에서 매일 저녁 8시 20분에서 9시 30분까지 기도의 불을 밝히고 있으며 바통을 이어받은 최혜경 전도사는 15명 정도의 기도특공대와 함께 “4만 40만 1천만 전도제자를 세워 세계복음화를 이루고자하는 류목사님의 성령충만과 임마누엘교회와 237나라 살리는 성전건축을 위해 매일 밤 집중기도 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기도특공대

2001년 11월 16일 류광수 목사를 시대적인 전도자로 키운 기도의 어머니 장차연 권사가 소천한 후, 기도의 사명을 천명으로 받은 이신혜 전도사와 몇 명의 권사들이 교회 본당 앞쪽에서 매일 저녁 8시 20분에서 9시 30분까지 기도의 불을 밝히고 있으며 바통을 이어받은 최혜경 전도사는 15명 정도의 기도특공대와 함께 “4만 40만 1천만 전도제자를 세워 세계복음화를 이루고자하는 류목사님의 성령충만과 임마누엘교회와 237나라 살리는 성전건축을 위해 매일 밤 집중기도 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임마누엘교회 전경
2002년 12월 2일

동삼제일교회는 2002년 12월 2일 부산 동삼제일교회에서 임마누엘교회로 명칭을 변경하였습니다.
‘동삼동’의 교회에서, 이제는 전국과 세계로 전도제자를 파송하는 교회로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요1:23)

제4차 홈커밍데이

임마누엘교회는 2004년 11월 18일부터 21일까지 임마누엘선교대회를 개최하여, 임마누엘교회 파송 선교사뿐만 아니라 다락방전도운동에 참여하는 선교사들이 다락방전도운동의 모체가 되는 본교회를 방문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매해 세계선교대회 전후로 ‘Home Coming Day(홈커밍데이)’를 개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마음에 담고 체험되어지는 선교’를 모든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 평신도선교회 주관으로 선교사들을 초청하여 현지의 소식을 직접듣고 기도하며, 선교사들과 직접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자리이며, 후대들에게 선교마인드를 심어주기 위해 선교대회 마지막 날인 주일은 선교사들이 각 기관의 메신저로 서도록 했습니다.

제5차 홈커밍데이

임마누엘 평신도선교회는 ‘1천만 제자’를 파송하기 위해 목회자 뿐 아니라 평신도가 일어나야 하며, 선교의 힘을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강조했고, ‘선교와 전도의 마인드를 심어주기 위해’, ‘선교사를 내 가족처럼 기도하고 후원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개최한 임마누엘 선교대회는, 파송된 선교사와 파송한 성도들이 가족처럼 하나가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대회가 되었습니다.

RUTC 준공 감사예배 컷팅식

“RUTC 시대를 맞이하여 인생 개혁, 종교 개혁, 문화 개혁을 이루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근원적 축복 속으로 들어가자.”
2005년 5월 31일 ‘렘넌트공동체훈련장(Remnant Unity Training Center) 건립 추진위원회’가 발족됐습니다. 이미 2003년 평신도지교회에서 무엇보다도 후대를 위해 ‘렘넌트 생활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바 있는데 류광수 목사는 렘넌트들을 준비시키며 “전도가 무엇인지, 세계정복이 무엇인지, 유대인이 어떤 것인지, 미국과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가는지 만들어 갈 장이 필요하다.” 고 말했고 RUTC는 이 말씀의 응답이 되었습니다.

RUTC 강의동 준공 감사예배

“RUTC 시대를 맞이하여 인생 개혁, 종교 개혁, 문화 개혁을 이루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근원적 축복 속으로 들어가자.”
2005년 5월 31일 ‘렘넌트공동체훈련장(Remnant Unity Training Center) 건립 추진위원회’가 발족됐습니다. 이미 2003년 평신도지교회에서 무엇보다도 후대를 위해 ‘렘넌트 생활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바 있는데 류광수 목사는 렘넌트들을 준비시키며 “전도가 무엇인지, 세계정복이 무엇인지, 유대인이 어떤 것인지, 미국과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가는지 만들어 갈 장이 필요하다.” 고 말했고 RUTC는 이 말씀의 응답이 되었습니다.

로버트 콜만 목사, 류광수 목사, 故 김준곤 목사
2005년 9월 18일

한편 RUTC 건립은 한국 교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불러 모았습니다. 평소 다락방전도운동에 관심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던 故 김준곤 목사는 2005년 5월, 임마누엘서울교회와 RUTC를 방문하며 말씀을 전했습니다.

장로 고시

류광수 목사는 2002년 원단 메시지에서 ‘700지교회’를 선포한 이후, 2006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중직자 시대’를 열면서 ‘성경적 중직자를 세우기 위한 개혁안’을 제시했습니다.
시대적 요청 속에 들어오게 될 중직자들을 선발하여 ‘중직자 학교’를 개설, 1년 동안 훈련을 받게 했습니다.
이에 교회에서는 1년 동안 훈련받을 리스트를 작성하여 훈련을 통한 개인의 변화, 올바른 헌금관, 전도, 공동체를 이루며 교회에 대한 사명, 문화 개혁에 대한 비전 등을 스스로 점검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교회에서 이런 과정을 통과했을 때 노회에서 중직자 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자격이 주어지며, 이렇게 세워지게 될 중직자들은 지역을 책임지는 전도자로서 지교회에 파송하도록 했습니다.

창립 20주년 기념 및 제 3회 임직식
2007년 11월 17일

이에 따라 임마누엘교회는 2006년 6월 4일부터 제1기 임마누엘 중직자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그동안 임마누엘교회가 대외적인 사역에 치중되었던 면이 있었는데, 2006년 6월 중직자훈련을 시작하게 되면서 교회 내 시스템을 강화하게 된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2007년부터 중직자 메시지가 선포되기 시작했고, 임마누엘교회는 창립 20주년 기념 및 3번째 임직감사예배를 2007년 11월 17일에 드렸습니다.

도시락 당회
2008년 11월 23일

창립 20주년 임직감사예배 이후 중직자들이 세워지는 가운데, 류광수 목사는 2008년 화요집회에서 ‘전도기획팀’을 세울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2008년 10월 5일 처음으로 중직자 도시락 당회가 열렸으며, 10월 26일부터 기획팀을 비롯한 팀이 구성되었습니다.
2008년 당시 17개였던 부산시 행정구역을 13개 권역으로 재편성하여 교회의 모든 조직과 시스템은 700지교회를 세우는데 초점을 맞추기로 하고 먼저 지역의 장로들을 중심으로 지교회를 형성하는데 집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도시락 당회
2008년 11월 23일

임마누엘교회의 700지교회 조직은 각 지교회를 책임지는 중직자, 평신도사역자, 전문인, 대학청년, 국내외 렘넌트들이 5인1조를 이루어 운영되고 있으며, 이들 현장지교회에 대한 사례 보고는 매 주일 점심시간을 활용한 중직자 전도기획팀(도시락당회)에서 포럼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도시락 당회
2008년 11월 23일

당시 류 목사는 첫 번째 당회 보고 때 다음과 같이 700지교회의 방향을 설명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직자들이 메시지에 은혜를 받아야 한다. 중직자들은 산업 현장 때문에 가장 훈련을 받지 못해서 오히려 취약하다. 도시락당회를 통해 중직자들이 주간 메시지를 잘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중직자들은 각 지교회에 가서 그 흐름을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전도기획팀이 만들어지면서 각 지교회는 체계적인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각 지교회별로 시스템을 통한 말씀 운동이 확산되었고, 어린이 렘넌트 다락방, 개인양육 다락방, 요일 다락방, 부부 다락방, 전도캠프 등이 지교회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감사예배 후 기념사진
2011년 6월 21일

임마누엘교회가 소속되어 있었던 대한예수교장로회(전도)총회는, 2004년에 예장합동 총회 가입을 두고 김준곤 목사의 중재로 의논을 한 적이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무산되었습니다. 이후 임마누엘교회와 전도총회는 이단 누명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전도, 선교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총회의 개신대학원대학교 이사장이었던 조경대 목사가 전도총회 영입을 제안해 온 것입니다.

기독교신문(다락방운동 이단성 없는 정치문제)
2006년 4월 16일

2011년 2월 11일 예장개혁 임원회는 전도총회의 영입 문제를 논의하고 먼저 이단대책위원회에 전도총회 류광수 목사에 대해 연구 보고를 하게 했습니다. 개혁총회 이단대책위원회는 위원장이었던 김송수 목사를 필두로 면밀한 연구 조사를 실시했고, ‘이단성 없다.’는 결론을 내어 이를 총회에 보고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에 드리는 글(신문기고)
2011년 5월 24일

예장개혁측은 5월 17일에 성명을 발표하여, ‘전도총회 영입은 총회 합동 전권위원회와 영입 전권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합법적으로 진행하게 될 것’이라고 공표합니다. 이후 일주일 뒤인 2011년 5월 24일 전도총회는 <한국 교회에 드리는 글> 이라는 성명서를 조선일보에 발표하고, “앞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개혁) 소속으로서 한국 교회를 섬기겠다.”고 선언하게 됩니다.

조경대 목사 및 개혁총회 관계자들과 함께
2011년 6월 21일

그리하여 2011년 6월 21일 오후6시, 일산 킨텍스3층 그랜드볼룸에서 5천여 명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영입전권위원장 조경대 목사의 사회로 전도총회 산하 17개 노회의 영입 감사예배가 드려졌습니다.

개혁총회 영입 감사예배에 모인 사람들
2011년 6월 21일

그리하여 2011년 6월 21일 오후6시, 일산 킨텍스3층 그랜드볼룸에서 5천여 명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영입전권위원장 조경대 목사의 사회로 전도총회 산하 17개 노회의 영입 감사예배가 드려졌습니다.

개혁총회 영입 감사예배 류광수 목사
2011년 6월 21일

류광수 목사는 인사말을 통해 “1991년부터 20여 년간 이단 관련설로 어려움을 당했다. 지금까지 10번 정도 한국교회와 같이 가고 싶다고 성명서를 내고, 여러 차례 한국 교회를 섬기기 위한 시도를 했지만, 그때마다 이단이라고 받아주지 않았다. 그런데 20년만에 저에게 이단 하지 말고 바르게 복음 전하라는 교단이 나왔는데 그 교단이 개혁교단이다. 저는 개혁교단이 참 복음 가진 교단이라고 확신하며, 우리를 지도해 줄 수 있는 용기 있는 교단이라 생각하고 한국 교회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어 축사에서 증경총회장 정은주 목사는 “전도총회가 전도에 방해가 되거나 교권이 나오면 총회를 해산시키겠다고 했는데, 그 신앙고백과 중심, 믿음이 지금도 마친가지이기에 총회를 해산한다.”고 말했습니다.

*다락방 전도운동 이단 시비와 이단 지정 해제에 이르기까지 과정
1987.8.2. - 부산 영도 동삼제일교회 개척
1990.10 - 부산노회 산해원교회 탐방 이유로 정직, 부산노회 탈퇴
1991.11 - 예장합동 부산노회 류광수 목사 이단 정죄 및 목사 면직
1996.07.24. - 한국기독교이단사이비대책협의회 주최 공청회
1996.09 - 예장합동 제81회 총회 류광수 목사 이단 규정
1997.09.10. -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도총회 조직
2004.09 - 전도총회 복귀 청원
2005.09 - 전도총회 복귀 무산
2011.05 - 전도총회 해체
2011.06 - 예장개혁 총회로 영입
2012.12.28. - 한기총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이하 이대위), 전문위 공청회
2013.01.04. - 한기총 정기총회에서 ‘류광수 목사 다락방 이단성 없다’는 이대위 보고 임원회 통과, 가결

한기총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의 류광수 목사 공청회
2012년 12월 28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에서는 2013년 1월 4일 임원회를 열고, ‘류광수 목사에 대한 전문위원의 연구 검증 결과와 공개청문회를 거쳐 심의한 결과 이단성이 없다.’는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의 검증 결과 보고서를 만장일치로 채택했습니다.
이대위는 이날 서면 보고를 통해 “류광수 목사에 대한 예장합동 총회로부터 면직처분한 내용의 건, 김기동의 귀신론, 권신찬 및 박옥수의 구원론, 위트니스 리의 지방교회의 재영접설에 관한 건, 사탄결박권과 천사동원권에 대한 건 등 10개 항목에 대해 연구 검증하고 공개청문회를 거쳐 심의한 결과 이단성이 없음을 보고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처럼 한기총이 ‘이단성 없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지 1년 후, 류광수 목사는 ‘2014 한기총 회원 교단 워크숍’에서 400여 명의 목회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기총 공식석상에서 첫 강연을 했는데, 류광수 목사는 ‘30년 전도 활동을 보고드린다.’고 전제한 후 말씀을 전했습니다.

신앙고백문을 낭독한 류광수 목사
2013년 1월 4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에서는 2013년 1월 4일 임원회를 열고, ‘류광수 목사에 대한 전문위원의 연구 검증 결과와 공개청문회를 거쳐 심의한 결과 이단성이 없다.’는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의 검증 결과 보고서를 만장일치로 채택했습니다.
이대위는 이날 서면 보고를 통해 “류광수 목사에 대한 예장합동 총회로부터 면직처분한 내용의 건, 김기동의 귀신론, 권신찬 및 박옥수의 구원론, 위트니스 리의 지방교회의 재영접설에 관한 건, 사탄결박권과 천사동원권에 대한 건 등 10개 항목에 대해 연구 검증하고 공개청문회를 거쳐 심의한 결과 이단성이 없음을 보고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처럼 한기총이 ‘이단성 없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지 1년 후, 류광수 목사는 ‘2014 한기총 회원 교단 워크숍’에서 400여 명의 목회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기총 공식석상에서 첫 강연을 했는데, 류광수 목사는 ‘30년 전도 활동을 보고드린다.’고 전제한 후 말씀을 전했습니다.

제 4회 임직식 기념촬영
2013년 11월 10일

2013년 임마누엘교회의 4번째 임직예배가 열렸습니다. 이번 임직예배는 개혁교단 영입 후의 임직예배로, 700지교회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시점이어서, 더욱 의미있는 예배가 되었습니다.
이날 임직식은 임마누엘교회가 소속되어 있는 예장(개혁) 총회의 임원들과 교계 관계 인사, 임직자와 가족, 친지, 성도 등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은혜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김송수 목사는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벧전4:10-11)”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이 시간 갖는 임직식은 역사적이고 기념비적인 예식”이라며, “첫째는 선한 청지기를 세우는 복된 예식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개혁교단이 목표로 삼고 있는 1만 교회 세우는 출정식이나 다름없이 때문이며, 셋째는 한국교회 안에서 이단 논쟁을 불식시키고 이를 만천하에 선포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문화가정을 위한 사랑음악회
2013년 8월 17일

2017년에 접어들면서 임마누엘교회는 치유와 서밋을 전도의 핵심으로, 7현장을 선교의 핵심으로 잡기 시작했습니다. 집중팀, 치유팀 등 본부의 훈련팀들과 함께 모든 사람에게 미션을 전달하라는 메시지에 따라 비밀결사대의 역할을 하면서 렘넌트를 도우며 홀리메이슨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직자들의 집중사역이 활발히 일어났습니다.
선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복지, NGO, 미자립, 문화, 다민족, 난민(탈북자), 엘리트치유 등 7현장입니다. 또한 국내 전도의 중요한 키(key)는 치유스쿨과 서밋스쿨입니다.

사하구 종합사회복지관 힐링캠프
2018년 6월 29일

이에 중직자와 렘넌트들은 현장을 살리는 집중훈련의 포인트를 붙들기 시작했고, 임마누엘 렘넌트들은 제3 RUTC 운동인 문화 복지 전도캠프를 진행하였습니다. 70여명의 복지관 노인대학생을 대상으로 문화 공연 및 재능기부를 진행한 것입니다.
사하구종합사회복지관과 연결된 현장에서 문화 공연, 재능기부와 더불어 현장 상담, 시급한 영혼에게 바로 복음을 전달하고 영접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어르신손맛사지 힐링캠프에 중직자, 렘넌트가 함께
2018년 6월 30일

이렇게 임마누엘교회의 중직자들은 렘넌트들과 함께 복음을 이해하고, 모든 성도를 이해하며 교회를 이해하고, 재앙을 막는 전도를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축복의 흐름을 이해하고 현장으로 들어가고 있으며 초대교회의 흐름의 언약을 직분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바누아투 대통령부부와 함께

110년 전, 맥켄지 선교사를 통해 부산에 뿌려지기 시작했던 복음의 씨앗은, 오늘날 한국과 오세아니아를 잇는 귀한 열매로 맺혀지게 되었는데 바누아투 선교의 응답은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오세아니아에 위치한 섬나라인 바누아투는, 1980년 7월 30일에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 지배에서 벗어난 나라로서, 솔로몬제도, 호주, 뉴질랜드와 비교적 가까운 편입니다.
2014년 사단법인 세계복음화 전도협회는 바누아투 정부, 말라시타푸 장로교회와 ‘국제복음교류협약조인식’을 가졌습니다. 그 협약내용은 바누아투 복음화와 사회복지 증진을 위해 적극 협조하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바누아투 혜륜국립유치원

특히 2013년에 문을 연 바누아투 혜륜국립유치원은, 한 렘넌트의 기도와 사명이 담겨져 있는 곳입니다. 임마누엘울산교회의 고혜륜 렘넌트는 꿈꾸어왔던 세계복음화와 선교 비전을 위해 부산외국어대학교에 진학했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했다가 강당이 붕괴되는 사고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딸의 기도제목과 선교 비전을 알고 있었던 고혜륜 렘넌트의 부모가, 딸의 보상금을 바누아투 유치원 건립에 드리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탕이 되어 설립된 혜륜국립유치원에서는, 현재 여덟 개의 교실에서 170여명의 어린이들이 복음에 기초한 교육을 받고 있으며, 특히 EMS(English Mission School)팀이 이들에게 교육, 문화 컨텐츠를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있습니다.

바누아투 전도집회

다락방 전도운동의 바누아투 선교는 렘넌트 계층 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해마다 바누아투 대통령 및 고위 공직자들이 세계선교대회와 세계렘넌트대회에 꾸준히 참석하며 서밋 선교의 응답을 누리고 있고, 의료선교팀 역시 매해 바누아투에서 의술과 복음을 전달하는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교회의 의료팀과 렘넌트들 역시 바누아투 전도집회와 의료캠프에 꾸준히 참여하면서, 서밋 선교의 응답과 축복을 함께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걸어온30년 걸어갈30년

임마누엘교회는 걸어온 30년, 걸어갈 30년을 넘어 주님께서 재림 오시는 그 날 까지 성경적 전도운동을 해나갈 것이고 이에 맞게 성전건축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30주년 기념 플래카드

세계 약 237개 나라들을 담아낼 수 있는 교회의 그릇을 준비하는 시대적 소명을 붙잡은 임마누엘교회는, 그동안 교회당 성전건축을 통한 성전운동의 흐름에 따라 현 교회당 건물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전도와 선교, 훈련의 인도를 받게 되었던 제1 성전운동, 전도운동이 전국과 해외로 더욱 확산되었던 지교회당 운동인 제2 성전운동, 237나라를 살릴 제3 성전운동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 1 성전운동 - 다락방전도신문(입당예배성황 기사)
1994년 11월 5일

1994년 11월 5일 임마누엘교회(당시 동삼제일교회)는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666-2에서 약 3,500평의 총대지 위에 본당, 사무실, 교육관, 훈련원 강의실, 숙소, 식당 및 주차장을 갖춘 제 1 성전시대의 막을 올렸습니다.
이 후 교회는 본격적으로 전도와 선교와 훈련의 인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1994년 12월 19일 70인 요원 운영준비회 모임을 시작으로 70인 1차 합숙훈련(95.4.24)-강사단 메시지 시작(95)- 미션홈에 대한 강의 실시(95.11)- 청학동 미션홈 개설(96.04)-선교사 훈련원 개원(97.3.6)-세계선교사대회(97.3.1)-세계렘넌트대회(97.07)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제 1 성전운동 - 3500평 입당기념예배
1997년 9월 10일

그리고 97년 9월 10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도총회가 결성됨에 따라 총회에 가입, 부산노회 소속 교회가 되었습니다. 99년 3월 9일 중직자 67명으로 제 2회 임직식을 하게 되고 이후 교회는 성전 건립을 위한 금융대출금을 모두 상환한 후 2001년 12월 2일 임마누엘교회로 명칭을 변경하였습니다.

제 2 성전운동 - 북지교회당 전경

성경적 전도전략을 따라가는 임마누엘교회는 성경에서의 바울이 한 전도시스템에 따라 제자를 먼저 찾고 제자와 함께 현장으로 들어가서 전도시스템이 만들어지는 지역에 지교회 운동을 하면서 역사에 남을 건물을 일으키는 성전운동, 즉 지교회당 운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제 2 성전운동 - 북지교회 입당예배
2018년 1월 14일

임마누엘교회는 지교회당 운동을 통해 많은 부교역자들이 훈련되게 하고, 이 운동에 중요한 중직자들이 더 일어나게 하며, 렘넌트들이 여기에 연결되게 하여, 그 지역을 대표하는 교회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각 교단에서는 부산 내에 전도운동을 막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나 오히려 이것이 전도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제 2 성전운동 - 워싱턴·보스턴·펜실베니아교회 연합임직식
2010년 11월 28일

1999년과 2003년 사이에 본격적으로 국내와 해외에 집중적으로 지교회가 설립되었고, 2004년 1월 18일부터 해외 지교회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세워졌습니다.

제 2 성전운동 - 보스턴교회 윤안철 장로임직
2007년

1999년과 2003년 사이에 본격적으로 국내와 해외에 집중적으로 지교회가 설립되었고, 2004년 1월 18일부터 해외 지교회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세워졌습니다.

제 2 성전운동 - 애틀란타교회 임직식
2010년 5월 11일

1999년과 2003년 사이에 본격적으로 국내와 해외에 집중적으로 지교회가 설립되었고, 2004년 1월 18일부터 해외 지교회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세워졌습니다.

제 2 성전운동 - 오다와라교회 임직식
2010년 10월 6일

1999년과 2003년 사이에 본격적으로 국내와 해외에 집중적으로 지교회가 설립되었고, 2004년 1월 18일부터 해외 지교회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세워졌습니다.

임마누엘 30년의 발자취

약 3,500평의 대지 위에 세워진 본당 및 여러 시설도 입당예배 후 곧바로 예배 공간의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주일 예배에는 앞자리에 앉기 위한 빈번한 다툼이 일어났고, 상황을 모르는 새가족들은 비어있는 자리에 앉으려다 강제로 내몰려 상처입고 교회를 떠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장마철에는 낡은 교회당 건물에 비가 샜으며, 본당으로 흘러들어온 물을 밤새 퍼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다보니 새로운 성전건축에 대한 기도가 자연스럽게 시작되었고 2009년 건축위원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제 3 성전운동 - 성전건축을 위한 임마누엘 원니스 축제
2009년 8월 22일

부산 강서체육관에서는 지교회당을 포함한 임마누엘교회 전 성도들이 모여 ‘이유있는 성전건축을 위한 임마누엘 원니스 축제’라는 주제로 축제를 벌였습니다. 성전건축을 위한 헌금작정이 있을 줄 알았던 이 행사에서는 예상과 다른 메시지가 선포되었고, 헌금 작정이 아닌 실제적인 기도를 먼저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덕평 RUTC 건립이 시작되면서 교회 건축은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가 2014년 건축위원회가 다시 새롭게 구성되었습니다.

237 치유 서밋 기도제목
2016년 4월 6일

2016년 4월 6일 본격적인 성전건축 헌신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주일 2부 예배는 거의 대부분 성전건축 헌신예배로 드려지며 제 3 성전운동의 방향이 제시된 것인데 “237나라, 렘넌트 살리는 치유하는 건축”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성전건축위원회에서만 논의되었던 성전건축이, 임마누엘교회의 전 성도, 그리고 함께 메시지를 듣는 국내 다락방교회들, 나아가 전 세계 교회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습니다.
임마누엘교회의 걸어온 30년, 가장 중요한 시간표는 성전 건축이 되었습니다.

제 3 성전운동 - 성전건축을 위한 목사·장로 소통세미나
2018년

2018년에는 새로운 성전의 계획설계(마스터플랜)를 준비하게 되었고, 그 해 5월경에는 전 성도들에게 공개되었으나, 이후 하나둘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대규모 수목 훼손, 난개발, 부산시청의 허가’등의 문제로 사실상 허가를 받기가 힘든 상황임이 밝혀진 것 입니다. 이로인해 건축 개발행위허가를 취하하고 다른 해결책이 나올때까지 또다시 잠정 중단되었습니다.

제 3 성전운동 - 성전건축을 위한 목사·장로 소통세미나
2018년

2018년에는 새로운 성전의 계획설계(마스터플랜)를 준비하게 되었고, 그 해 5월경에는 전 성도들에게 공개되었으나, 이후 하나둘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대규모 수목 훼손, 난개발, 부산시청의 허가’등의 문제로 사실상 허가를 받기가 힘든 상황임이 밝혀진 것 입니다. 이로인해 건축 개발행위허가를 취하하고 다른 해결책이 나올때까지 또다시 잠정 중단되었습니다.

제 3 성전운동 - 성전건축을 위한 특별 집중 새벽기도
2018년

2018년 9월 16일, ‘성전건축 계획 보고회’가 진행되었는데 “우리 생에 마지막 작업으로, 전도운동으로, 전 기도의 힘을 모으고 정말 역사에 남는 응답, 우리의 모든 것이 투입되어서 후대에게 남기는 일을 하라.”는 짧지만 분명한 메시지가 전달되었습니다.

제 3 성전운동 - 성전건축을 위한 특별 집중 새벽기도
2018년

모든 성도가 원니스되어 성전건축의 정확한 언약을 마음에 담을 때, 하나님은 성전의 본질을 회복시키셨듯이 전 세계 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시대에,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교회당이 아닌, 만민을 향한 복음운동을 일으시키려는 세계복음화의 언약이 먼저 심겨지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당회 건축계획 관련 보고

이후 건축위원회는 앞선 실패를 면밀히 검토하며 관련 법령을 재검토하여 새로운 건축계획을 수립하였고, 성전건축 메시지로부터 성전건축의 목표와 방향을 찾고 이를 실현시킬 구체적인 설계방안을 담은 성전건축 설계지침서를 작성하여 당회에 발표, 검토되었습니다.

성전건축 설계 계약 체결
2019년 11월 20일

드디어 (주)하나플러스 건축사와 설계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성전건축을 향한 본격적인 신호탄이 쏘아 올려졌습니다.

성전건축 조감도

237나라 살릴 성전에 대한 언약 성취인 임마누엘교회의 제3 성전운동은 이미 진행중에 있습니다.

성전건축 조감도

237나라 살릴 성전에 대한 언약 성취인 임마누엘교회의 제3 성전운동은 이미 진행중에 있습니다.

성전건축 조감도

237나라 살릴 성전에 대한 언약 성취인 임마누엘교회의 제3 성전운동은 이미 진행중에 있습니다.

성전건축 조감도

237나라 살릴 성전에 대한 언약 성취인 임마누엘교회의 제3 성전운동은 이미 진행중에 있습니다.

성전건축 기도제목

1. 성전건축을 통해 모든 것을 회복하는 날이 되게 하옵소서
2.부산을 대표하는 교회로, 세계복음화 할 수 있도록 홀리메이슨의 언약을 붙잡게 하옵소서
3. 237나라 다민족이 와서 훈련받고, 각 나라 살릴 제자로 파송될 수 있는 성전이 세워지게 하옵소서
4. 오직복음, 완전복음, 순수복음을 후대에게 지속적으로 전달하는 시스템을 남기는 성전, 렘넌트 영성훈련할 성전, 치유스쿨, 서밋스쿨, 다민족스쿨 하는 성전이 세워지게 하옵소서
5. 성전건축을 위한 비밀결사대, 렘넌트 키우는 렘넌트 미니스트리, 우상문화와 싸울 홀리메이슨의 축복을 받게 하옵소서.
* 한번뿐인 인생, 우리 인생의 마지막 기회에, 영원히 남을 인생작품을 남기는 성전건축이 되게 하옵소서!

2021 응답의 현장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