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조은뉴스=이재훈 기자] 성경 누가복음을 보면 지은이 누가는 완전복음을 이해하고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이 시대의 크리스천은 의사 누가와 같이 복음을 가진 전문인 전도제자의 응답으로 세상을 살려야 한다. 누가가 작성한 사도행전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응답이 계속되고 있다.
실제 복음의 간증문이 독자에 읽혀 질 때 성령이 역사하고 흑암이 결박되고 하나님나라가 임할 수 있도록(마12:28), 다윗이 수금을 연주할 때 사울의 악신이 떠나갔던 것처럼(삼상16:23) 실제로 영적인 부분을 발견하고 영적인 사실을 체험하는 임마누엘 증인의 응답 속으로 다함께 들어가 보자.
<투병 중인 손여선 고등부 간증 >
그러다 어느 날 엄마가 갑자기 한국에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항상 엄마와 함께 있었는데 먼저 한국에 들어가시니 대만에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워 저도 엄마가 있는 한국에 왔습니다. 한국생활은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어렵게 한글을 배우고, 피아노도 목사님의 딸에게 배울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저의 자랑을 하자면 부끄럽지만 저는 춤과 노래를 좋아하고요, 대회를 나갈 만큼 피아노도 빨리 배웠습니다.
하지만 저의 학교생활은 친구들의 놀림과 욕으로 인해 매일 괴롭고 슬픈 왕따였습니다. 저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혼자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자주 이사하는 게 너무 싫었지만 엄마가 갑자기 지방으로 내려가자고 하셔서 저는 어쩔 수 없이 중3때 지방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2010년부터 저의 왼쪽 엉덩이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아프니까 학교생활은 더 힘들고 일 년 넘게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며 침도 맞아보고 물리치료도 받았지만 아프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아픈 가운데에도 하나님 은혜로 지난해에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춤과 노래를 너무 좋아했기에 예능계 고등학교의 수업은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생각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통번역 사역자 손무지 집사 간증(손여선 어머니) >
저는 2007년 대만에서 한국으로 왔고 올해로 5년째 접어듭니다. 원래 저는 한국에 사는 화교였는데, 한국에서 결혼생활을 얼마하지 못하고 대만으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편은 병에 걸려 매주 피를 투석해야 했고 한국에서 병원비를 감당하기 힘들어 의료비가 무료인 대만으로 갔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한국생활을 접고 남편의 투병을 위해 대만으로 갔지만 10년 만에 남편은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다가온 불행한 삶이 나를 너무 암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1999년 어느 여름날, 한국에서 대만에 온 유학생에게 저는 복음을 듣게 되었고, 수소문 끝에 김 목사님이 시무하고 계시는 대만 타이쭝 선교교회로 가게 되었습니다.
저의 통역사역은 세례를 받은 1999년 겨울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에서 화교로 살면서 익힌 한국말이 대만에서 복음 통역사로 쓰임 받게 될 줄은 정말 몰랐고 이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당시 대만에 자주 강의를 하러 들어오셨던 박 목사님의 소개와 도움으로 한국의 총신 야간 전도사과정반을 입학하면서 다시 저의 한국생활이 시작됐고, 2008년에는 신학교 학부에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희 딸 여선이도 한국으로 입국하여 한국말을 배우면서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습니다. 2009년도에 저는 교회에 훈련을 받으러 오신 말레이시아 목사님 부부의 통역을 전담하기 위해 학교공부를 중단하고 지방으로 급히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한해씩 지내며 보낸 세월을 되돌아보면 대만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행복한 전도자의 삶이었습니다.(인터뷰협조=강민아 시민기자)